FICTION현실 지침 아님

흰 정오가 지나간 자리

시장 골목 끝에서 빛이 먼저 도착했다. 폭발음은 열네 분 뒤에 왔고, 그사이 사람들의 그림자는 아직 하지 않은 마지막 행동을 보여 줬다.

정오 12시 18분, 시장 골목의 색이 한꺼번에 빠졌다. 햇빛보다 희고 번개보다 오래가는 빛이 건물 사이를 채웠다. 모두 눈을 감았지만 발밑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짙어졌다.

평범한 한국 시장 골목이 수평선 너머의 흰빛에 잠기고 상인이 아이의 눈을 가리며 사람들의 긴 그림자가 드리운 허구 장면 (AI 생성 삽화)
AI 창작 삽화허구 장면폭발음이 오기 전의 열네 분. 몸은 아직 서 있었지만 그림자는 각자의 마지막 일을 이미 시작했다.생성: OpenAI ImageGen

빛과 소리 사이

재난 문자는 오지 않았다. 라디오는 잡음만 냈고 비둘기 떼가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멀리 솟은 것은 구름인지 연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시장 안에는 아직 폭발음도 바람도 닿지 않았다.

채소 가게 주인 선옥의 그림자가 길 건너 약국으로 달렸다. 선옥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검은 형태는 문을 두드리고 바닥에 놓인 아이를 안았다. 오토바이 기사의 그림자는 넘어질 사람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모든 그림자는 주인보다 열네 분 앞서 있었다. 어떤 그림자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고, 어떤 그림자는 셔터를 내렸다. 한 남자의 그림자는 골목 끝을 향해 혼자 달렸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도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해진 마지막 일

그림자는 곧 예언으로 해석됐다. 곧 자신이 할 행동이라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옥은 약국으로 달렸고 그림자가 안았던 아이를 찾았다. 하지만 약국 바닥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시장 입구에서 길을 잃은 아이가 울고 있었다. 선옥이 아이에게 다가가자 그림자도 약국에서 돌아 나와 그 자리에 겹쳤다. 미래는 장소를 정확히 보여 준 것이 아니라, 하려던 마음의 모양만 먼저 만든 것이었다.

그림자를 따라 하던 몸들이 골목에서 서로 부딪혔다. 누군가의 마지막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닫힌 셔터는 다른 사람의 길을 막았다. 좋은 행동도 동시에 일어나면 하나의 장애물이 됐다.

열네 번째 분

시장 시계는 움직였지만 흰 정오는 끝나지 않았다. 그림자들은 점점 몸에서 멀어졌다. 선옥의 그림자는 아이의 눈을 가렸고, 선옥은 왜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같은 자세를 취했다.

열네 번째 분이 시작되자 골목 끝의 유리창이 안쪽으로 휘었다. 소리는 아직 없었지만 공기가 거대한 벽처럼 다가오는 모습은 보였다. 그제야 그림자들이 한꺼번에 몸으로 돌아왔다.

누구의 그림자도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남은 짧은 시간에는 이동 거리보다 마지막에 설 자리가 선택됐다. 선옥은 이름도 모르는 아이의 눈을 두 손으로 감쌌다.

소리 뒤의 시장

폭발음이 지나간 뒤 골목의 절반이 없어졌다. 남은 간판은 글자를 잃었고 시장 시계는 12시 32분에 멈췄다. 선옥은 무너진 천막 아래에서 아이와 함께 눈을 떴다.

구조대는 생존자를 찾을 때 그림자를 먼저 살폈다. 흰빛 속에서 본 마지막 행동을 기억해 그 사람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짐작했다. 예언은 아무도 구하지 못했지만, 사라진 사람의 의도를 남겼다.

며칠 뒤에도 정오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아이는 강한 빛을 보면 스스로 눈을 가렸다. 선옥은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시장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무너진 골목 한쪽에 빈 의자와 장바구니, 포장을 뜯지 않은 붕대가 놓였다. 흰빛이 돌아오는 정오마다 물건의 그림자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