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현실 지침 아님

귀가하는 사람들

감염자는 말을 잃었지만 마지막 일과는 잊지 않았다. 매일 같은 시각, 같은 현관 앞에 돌아오는 이들을 주민들은 차마 낯선 괴물이라 부르지 못했다.

택배 기사 민수는 매일 오후 일곱 시 3동 현관에 돌아왔다. 인터폰은 죽어 있었고 배송 가방은 비어 있었다. 그는 아무 번호나 누르지 않았다. 생전에 가장 많이 방문했던 704호 버튼만 정확히 열두 번 눌렀다.

비 오는 밤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 감염된 주민들이 인터폰 누르기와 화단 물주기 등 익숙한 일과를 반복하고 이웃들이 계단에서 지켜보는 허구 장면 (AI 생성 삽화)
AI 창작 삽화허구 장면오후 일곱 시의 귀가 행렬. 현관은 잠겼지만 사람들은 생전에 가장 많이 지나던 자리를 다시 찾는다.생성: OpenAI ImageGen

남아 있는 시간표

감염된 사람들은 거리를 헤매지 않았다. 버스 기사는 운전대 없는 폐차 앞에 앉았고, 경비원은 두 시간마다 닫힌 차단기를 올리는 시늉을 했다. 초등학생은 아침 여덟 시 십 분이면 단지 문 앞에 섰다가 오후 두 시에 돌아왔다.

그들은 이름을 알아듣지 못했고 거울 속 얼굴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몸에 밴 순서는 정확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계단을 택했고, 비가 오면 처마 아래에서 우산을 펴는 시늉을 했다.

주민들은 처음에 그 일과를 이용했다. 같은 길만 비워 두면 감염자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복도 바닥에 선을 긋고, 귀가 시간에는 현관을 잠갔다. 아파트는 살아 있는 사람과 반복하는 사람의 시간표로 나뉘었다.

사라진 목적지

문제는 704호에 불이 났을 때 시작됐다. 집이 타 사라지자 민수는 현관 앞에서 처음으로 멈췄다. 열두 번째 버튼을 누른 뒤에도 문이 열리지 않자 천천히 뒤를 돌아,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주민을 바라봤다.

다음 날 민수는 그 주민의 일과를 따라 했다. 오전 여섯 시에 옥상에서 체조하고, 아홉 시에는 관리사무소 책상 앞에 앉았다. 원래의 주민이 움직이면 반 박자 늦게 같은 자세를 취했다.

목적지를 잃은 감염자는 다른 사람의 반복을 빌렸다. 빈 가게 앞의 감염자는 빵집 주인의 손동작을 따라 했고, 철거된 학교의 아이들은 출근하는 어른들 뒤에 줄을 섰다. 일상을 빼앗긴 사람은 자기 습관을 버려야 했다.

아무것도 반복하지 않는 날

단지 회의는 모든 주민이 하루 동안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기로 정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으로 밥을 먹고, 출근하던 사람은 지하실에 머물렀다. 엘리베이터는 짝수 층에만 섰고 정오에 저녁 방송을 틀었다.

감염자들은 길을 잃었다. 서로의 동선을 빌리려다 마당 한가운데 뒤엉켰다. 공격하지도 흩어지지도 못한 채, 수십 개의 미완성 동작을 조금씩 반복했다. 살아 있는 주민도 자기 행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잊기 시작했다.

704호의 노인은 매일 같은 시각 문 앞에 밥상을 놓던 사람이었다. 그날만큼은 시간을 바꾸라는 말을 들었지만, 노인은 일곱 시에 상을 들고 현관으로 내려왔다. 민수는 익숙한 순서를 발견하고 조용히 그 뒤에 섰다.

두 사람의 배달

노인은 민수에게 빈 그릇 하나를 건넸다. 민수는 그릇을 배송 가방에 넣고 704호가 있던 검은 벽 앞에 내려놓았다. 그 행동은 그의 생전 일과에 없던 일이었다. 주민들은 누가 누구를 따라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 날부터 노인과 민수는 함께 단지를 돌았다. 노인이 문 앞에 그릇을 놓으면 민수는 빈 그릇을 거뒀다. 목적지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반복이 생겼고, 다른 감염자들도 한 명씩 그 뒤에 붙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회복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름도 기억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일과는 혼자 만든 감옥이 아니라 함께 바꿀 수 있는 길이 됐다.

저녁 일곱 시, 노인은 빈 그릇을 놓고 민수는 그것을 가방에 넣었다. 두 사람 뒤로 서로 다른 보폭의 행렬이 마당을 한 바퀴 돌았다. 704호의 검게 탄 벽 앞에는 매일 같은 시각 새 그릇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