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가 마른 지 4년째 되던 날, 진흙 한가운데 맑은 물이 고였다. 지우의 아버지는 자기 이름표를 벗어 물 위에 놓았다.

한 사람분의 비
종이는 가라앉지 않고 녹았다. 물웅덩이는 양동이 하나를 채울 만큼 깊어졌다. 아버지가 물을 들고 돌아왔을 때 지우는 그를 알아봤지만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다.
휴대전화 연락처와 주민 명부에서도 이름이 사라졌다. 가족사진 뒷면의 글씨까지 빈칸이 됐다. 사람들은 그를 지우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다음 날 물은 다시 얕아졌다. 마을 방송은 이름표를 준비하라고 알렸다. 물을 배급할 사람부터 이름을 내야 했다.
빈칸의 마을
처음에는 노인들이 나섰다. 오래 불린 이름이니 이제 내놓아도 된다고 말했다. 곧 아이가 있는 부모와 밭을 지킬 농부가 줄을 섰다.
이름을 잃은 사람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계약할 수도, 투표할 수도, 자기 땅을 증명할 수도 없었다. 남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물과 기록을 관리했다.
지우는 명부의 빈칸 옆에 얼굴을 그렸다. 누가 어느 집에서 잠드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적었다. 이름이 없어도 한 사람의 자리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장부였다.
마시지 않는 하루
가뭄이 깊어지자 마을 대표는 아이들의 이름까지 받겠다고 했다. 지우는 자기 이름표를 들고 저수지로 갔지만 물에 놓지 않았다.
대신 빈 그릇을 웅덩이 옆에 두고 돌아왔다. 그날 몇몇 주민도 물을 받지 않았다. 남아 있던 물을 조금씩 나누면 모두가 하루는 버틸 수 있었다.
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들은 사라진 이름을 소리 내어 복원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별명과 습관을 말했다. 기억은 기록보다 느렸지만 빈칸을 사람으로 채웠다.
이름 밖의 비
며칠 뒤 웅덩이 주변에 그릇 수백 개가 놓였다. 누구도 이름표를 넣지 않았다. 물은 늘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입술이 갈라진 채 기다렸다.
새벽에 안개가 산에서 내려왔다. 빈 그릇마다 몇 방울씩 이슬이 맺혔다. 기적이라 부를 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이름을 잃지 않고 나눌 수 있는 물이었다.
지우는 첫 그릇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본명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우물 둘레에서 각자가 그와 함께 겪은 일을 한 문장씩 말하자, 빈 그릇 바닥에 물이 얕게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