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선은 지도에서 먼저 나타났다. 보건소 화면의 원이 골목 하나를 둘러싼 뒤, 같은 모양이 아스팔트 위에 번졌다. 페인트도 빛도 아닌 선은 문턱과 계단을 넘으며 사람들의 발목을 따라왔다.

움직이는 구역
선 안에서는 누구의 열도 오르지 않았다. 기침은 멎고 병은 잠든 것처럼 멈췄다. 하지만 한 사람이 선 밖으로 발을 내딛자 경계가 몸을 따라 움직이며 옆집까지 삼켰다.
감염자보다 선이 더 두려운 동네가 됐다. 골목에서 가족을 만나면 문을 닫고, 계단 아래 붉은 곡선이 보이면 옥상으로 돌아갔다. 경계는 매일 집 열 채씩 위치를 바꿨다.
가족이 선을 완전히 넘은 날, 바깥의 이웃은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오래 함께 산 이름과 얼굴, 빌려 준 그릇까지 기억에서 사라졌다. 격리에서 벗어나는 대가는 공동체에서 지워지는 일이었다.
기억의 주소
우편배달원 재호는 모든 집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선을 넘은 사람을 잊어도 글씨는 남았다. 그는 모르는 이름 앞으로 편지를 배달하며 매번 새로 이웃을 소개받았다.
하지만 글만으로 관계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사진 속 낯선 이와 함께 웃는 자기 얼굴은 불편했다. 빈방을 가족에게 내주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선 안쪽은 움직임을 멈췄다. 병은 멈췄지만 식료품과 물은 줄었다. 바깥쪽에서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물건을 들여놓을 이유가 사라졌다.
골목 전체의 선
재호는 자기 발로 붉은 경계를 밟았다. 선이 그를 따라 이동하자 그는 골목을 한 바퀴 돌았다. 경계는 모든 집을 지나며 점점 길어졌고 끝내 동네 전체를 하나의 선 안에 묶었다.
그 순간 누구도 서로를 잊을 수 없었다. 모두가 격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병은 멈췄고 문들이 하나씩 열렸다. 주민들은 기억하는 사람에게 다시 밥과 물을 건넸다.
대신 산 아래 도시가 동네를 잊었다. 버스 노선에서 정류장이 사라지고 행정 지도에는 빈 산만 남았다. 동네는 살아남았지만 바깥과 연결된 모든 이름을 잃었다.
경계가 없는 지도
몇 달 뒤 붉은 선은 색이 옅어졌다. 주민들은 선을 지우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 화분을 놓고 아이들이 그 위에 그림을 그리게 했다.
재호는 산 아래로 편지를 배달하러 갔다. 누구도 그가 사는 동네를 몰랐지만, 편지의 발신 주소에는 사람들이 손으로 그린 지도가 있었다. 지도에는 경계 대신 집 사이의 길만 표시됐다.
받는 사람은 처음 보는 장소를 찾아 산을 올랐다. 붉은 선을 넘는 순간 잊었던 얼굴이 돌아왔다. 기억은 격리의 안과 밖이 아니라, 누군가 직접 길을 걸어왔을 때 생겼다.
동네는 공식 지도에 돌아오지 않았다. 분필선 위로 유모차 바퀴와 장화 자국, 개의 발자국이 겹쳤다. 장맛비가 내린 뒤에도 그 자리만 단단한 흙길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