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볍씨는 흙에서도 배양액에서도 싹을 틔우지 않았다. 농업 연구원 미라는 할머니가 들려준 장마 이야기를 혼잣말로 반복했다.

기억으로 발아한 것
천둥과 젖은 흙냄새를 떠올리자 씨앗이 갈라졌다. 뿌리는 미라의 그림자를 향해 뻗었고, 며칠 만에 벼 이삭이 맺혔다.
수확한 날 미라는 장마를 기억하지 못했다. 비가 오래 내린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빗소리와 눅눅한 이불, 물웅덩이를 뛰던 감각은 사라졌다.
지하 농장의 사람들은 기억을 모았다. 눈이 녹는 냄새, 매미 소리, 첫서리의 아침을 들려주었다. 플랫폼은 초록으로 채워졌다.
계절 기부표
식량 위원회는 기억을 재산처럼 계산했다. 봄 기억은 잎채소, 여름 기억은 벼, 가을 기억은 열매에 배정했다. 오래 산 사람이 더 많이 내야 한다는 규칙도 생겼다.
기억을 여러 번 낸 노인들은 계절 이름만 남기고 그 안의 삶을 잃었다. 어떤 이는 배우자를 만난 봄을 잊었고, 어떤 이는 아이가 태어난 겨울을 잊었다.
아이들은 실제 계절을 거의 보지 못했지만 그림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상상의 계절에도 씨앗은 조금 반응했다. 수확량은 적었지만 아무 기억도 사라지지 않았다.
틀린 봄
미라는 아이들에게 본 적 없는 봄을 그리게 했다. 분홍 눈이 내리고 초록 해가 뜨는 그림도 있었다. 씨앗은 비뚤게 자랐지만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었다.
위원회는 예측할 수 없는 작물을 금지했다. 실제 기억만이 안정적인 식량이라고 주장했다. 미라는 남은 종자를 들고 사용하지 않는 터널 안으로 옮겼다.
아이들은 매일 다른 계절을 만들었다. 비가 위로 내리는 여름, 낙엽이 나무로 돌아가는 가을을 이야기했다. 농장은 작고 제멋대로인 숲이 됐다.
아직 오지 않은 계절
지상의 먼지는 걷히지 않았다. 기존 농장은 더 많은 기억을 먹고 같은 작물만 생산했다. 터널의 숲은 느리게 자랐지만 누구의 과거도 빼앗지 않았다.
어느 날 아이가 그린 푸른 딸기가 열렸다. 맛은 시고 껍질은 질겼다. 사람들은 실패라고 말하면서도 씨를 따로 모았다.
미라는 장마의 감촉을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첫눈이 온 날 그는 빈 화분에 새 씨앗을 묻고 날짜만 적었다. 이듬해 싹의 잎맥에는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계절 무늬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