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현실 지침 아님

괴수는 철거 예정지를 밟지 않았다

거대 생명체는 새 건물만 부수고 폐허를 피해 걸었다. 서울의 한 동네는 살아남기 위해 자기 집과 기록을 스스로 낡게 지운다.

괴수는 여의도의 새 유리 건물을 무너뜨린 뒤, 바로 옆의 공사 중단 건물은 돌아서 지나갔다. 도시계획 기사 민서는 그 차이를 가장 먼저 기록했다.

화면 밖 거대 생명체의 발이 재개발 구역의 낡은 집은 피해 가고 신축 건물 쪽을 내리누르는 허구 장면 (AI 생성 삽화)
AI 창작 삽화허구 장면살아 있는 집을 폐허라고 믿게 만드는 일이, 도시가 찾은 유일한 방어였다.생성: OpenAI ImageGen

완성된 것을 밟는 것

생명체는 높은 건물이나 소음에 끌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완성됐다고 여기고 이름을 붙여 관리하는 장소만 골랐다. 폐교와 빈 공장은 발밑에 있어도 건드리지 않았다.

시는 건물 외벽을 허물고 창문을 판자로 막았다. 전산 지도에서는 도로와 아파트 이름을 삭제했다. 불을 끈 동네는 괴수의 경로에서 흐릿해졌다.

사람들은 집을 지키기 위해 집이 아닌 척해야 했다. 우편은 오지 않았고 수도 수리도 중단됐다. 행정상 존재하지 않는 주민은 구호품도 받을 수 없었다.

폐허 주민증

민서는 재개발 구역의 집마다 낡은 천을 걸고 벽에 거친 줄을 그었다. 멀쩡한 지붕 일부를 뜯어 그 아래에서 생활했다. 괴수는 동네 입구에서 방향을 바꿨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몰려왔다. 빈집처럼 보여야 안전했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시장과 병원이 필요했다. 시설을 만들수록 동네는 다시 도시처럼 보였다.

주민들은 간판 없는 진료소와 이동하는 부엌을 만들었다. 사용한 흔적은 밤마다 치웠다. 공동체는 유지됐지만 흔적은 남길 수 없었다.

지워지지 않는 집

한 아이가 자기 집 벽에 가족 키를 표시했다. 민서는 지우라고 했지만 아이는 거부했다. 집이 살아 있다는 표시 하나쯤은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괴수가 골목 앞에서 멈췄다. 모두가 숨을 죽인 사이 생명체는 벽의 작은 선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집을 부수지 않고 몸을 낮춰 지나갔다.

민서는 괴수가 완성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것을 부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민들은 폐허 위장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다.

다시 이름 붙인 골목

사람들은 정식 간판 대신 매일 바뀌는 별명으로 장소를 불렀다. 부엌은 아침에는 구름집, 저녁에는 긴 식탁이 됐다. 지도는 연필로 그리고 계속 고쳤다.

괴수는 동네를 여러 번 지나갔지만 발을 들이지 않았다. 완성된 도시가 아니라 계속 고치는 삶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민서는 주민들이 부르는 길 이름을 작은 종이에 적어 담벼락마다 붙였다. 밤비가 절반을 씻어 갔고 아침에는 다른 이름들이 그 위에 덧붙었다. 괴수의 발은 어느 종이도 밟지 못한 채 빈 도로를 서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