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현실 지침 아님

심판은 사람 대신 주소를 불렀다

하늘의 검은 표식은 죄가 아니라 집 주소를 지목했다. 문패를 옮길 때마다 심판도 이웃집으로 이동하자 주민들은 모든 주소를 한곳에 모았다.

첫 검은 표식은 804호 현관을 비췄다. 자정이 되자 사람은 다치지 않았지만 집 안의 벽과 가구, 기록이 모두 빈 공간으로 사라졌다.

한국 아파트 단지 상공의 거대한 검은 직사각형이 한 현관을 비추고 주민들이 빈 문패를 옆집으로 넘기다가 모두 공동 현관의 나무틀에 모으는 허구 장면 (AI 생성 삽화)
AI 창작 삽화허구 장면누구의 죄인지 묻는 동안 문패는 계속 옆집으로 넘어갔다. 표식은 그 이동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생성: OpenAI ImageGen

주소를 보는 것

다음 날 표식은 1203호를 골랐다. 주민이 문패를 빈집에 옮기자 빛도 그 문으로 따라갔다. 심판은 사람의 얼굴이나 행동을 보지 않았다.

관리사무소는 매일 추첨으로 문패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빈집이 모자라자 체납 세대와 외부인을 먼저 지목하자는 말이 나왔다.

사람들은 심판의 이유를 만들어 냈다. 선택된 집에는 잘못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자기 집이 안전해 보였다. 표식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옆집으로 가는 밤

804호 가족은 임시 숙소에서 살면서 문패가 넘어가는 과정을 지켜봤다. 어제 도움을 준 이웃도 자기 차례가 오자 다른 문에 문패를 달았다.

초등학생 유진은 문패 여러 개를 놀이터 정자에 모았다. 검은 빛은 한 집을 비추지 못하고 넓게 퍼졌다. 자정 뒤 정자의 페인트만 조금 벗겨졌다.

주민들은 공동으로 받으면 피해가 나뉜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누구의 문패를 함께 둘지 결정하는 회의가 다시 싸움이 됐다.

호수 없는 현관

유진은 자기 집 문패부터 떼었다. 804호 가족과 경비원, 이웃들이 차례로 동참했다. 모든 문패를 공동 현관의 큰 나무틀에 넣었다.

그날 검은 빛은 단지 전체를 희미하게 덮었다. 각 집에서 컵 하나, 벽지 한 조각, 사진 모서리만 사라졌다. 누구도 집 전체를 잃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사람들은 잃은 것을 비교하지 않고 서로의 작은 빈칸을 고쳤다. 완전히 공평하지는 않았지만 피해를 남에게 넘기지는 않았다.

심판 뒤의 주소

표식은 매일 밤 돌아왔다. 주민들은 문패를 다시 달지 않았다. 우편과 배달은 공동 현관에서 나눴고, 사람을 찾을 때는 이름과 얼굴을 물었다.

검은 빛은 점점 옅어졌다. 선택할 주소가 없어서인지, 모두가 함께 받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유진은 빈 현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였다. 검은 빛은 잠깐 그 앞에 머물다가 옆 계단으로 미끄러졌다. 다음 날 배달원은 호수를 묻지 않고 그림 속 고양이의 줄무늬를 물었다.